사막의 꽃 ‘팔미라’를 찾아서
시리아는 우리보다 북한과 더욱 친한 나라다.
비수교국인 우리와 달리 북한과는 외교 관계까지 맺고 있고 레바논에 비해 한결 진한 이슬람 문화와 사회주의의 엄격함을 경험할 수 있다. 공화국이지만 사회주의 냄새가 남아있는 시리아는 곳곳에서 사진 촬영이 제한되고 대표적인 아랍국가답게 거리에는 히잡을 두른 여인들도 상당수다.
3.시리아-팔미라와 수도 다마스커스
레바논을 지나 시리아 국경을 넘으면 안티레바논 산맥을 따라 50km 정도의 내리막길 끝에 수도 다마스커스(Damascus)에 당도한다.
구약성서 아브라함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다마스쿠스지만 그 첫인상은 고색창연한 풍요로움이 아니라 건조한 메마름이다. 거친 모래사막을 닮은 잿빛 도시의 크고 작은 건물은 오래된 회색 일색이고 사람들의 운전도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칠다.
이슬람의 보물창고
다마스커스의 유구한 역사는 7개의 성문이 있는 로마 성벽안의 올드 다마스커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십자군을 몰아낸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 장군의 동상이 성벽을 지키는 구시가에는 지금도 활발히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과 우마야드 모스크, 기독교 유적지 등이 모두 모여 있다.
알-하미디야 시장(Al-Hamidiyah Souk)은 새로운 볼거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더없이 좋은 장소. 시리아에서 가장 큰 시장인 하미디야에는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빼곡히 들어선 상점이 끝없이 이어지며 각각의 상점에는 생필품외에도 신기한 아랍 물건이 즐비 하다. 시리아는 다윗과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셀주크투르크, 몽고, 프랑스 등 수많은 이방인에게 점령당한 바 있는 만큼 운이 좋으면 진귀한 골동품을 구입할 수도 있다.
쇼핑 나온 시리아 주민들로 북적이는 시장 통의 입구부터 한참을 걸으면 길은 이슬람 사원인 우마야드 모스크와 마주친다. 700년 경에 세워진 우마야드 모스크는 다마스커스 대사원으로 불릴만큼 아랍내에서도 중요한 사원으로 평가받는 곳. 살라딘 장군의 묘를 비롯해 사도 요한의 머리가 발견돼 사원 안에 보관 중인 곳으로도 유명하다.
길이가 130m에 달하는 사원 안은 자유롭게 사진촬영이 가능하며 예배당 안에는 세례 요한의 머리가 담긴 석관이 철장 안에 놓여 있다. 세례 요한의 무덤이 있는 이슬람 사원 안에서 이슬람 교도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이밖에 구시가에는 아나니아가 사도 바울의 눈을 뜨게 한 아나니아 교회(Hanania Church)와 사도 바울의 창 기념교회 등 기독교와 관련된 장소도 많이 있다.
바그다드 카페 지나 팔미라로
시리아 여행의 백미는 역시 팔미라(Palmyra)다. 다마스커스에서 동북쪽으로 3시간 이상(약 230km)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팔미라는 기원전 1세기부터 형성돼 기원후 2세기 경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한순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신기루 같은 도시다.
대추야자 도시라는 뜻의 아랍어인 타드모르(Tadmor)로도 불렸던 팔미라는 사막을 가로지른 중국과 인도의 문물이 유럽과 만나는 성대한 무역도시였다. 요르단의 페트라가 몰락한 후 고대 교역도시의 지위를 이어 받은 팔미라는 16만평의 대지 위에 최고 2만5,000명에서 3만명의 인구가 상주한 것으로 추정될 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팔미라는 로마의 영향을 받아 전반적으로 로마의 느낌이 나지만 사실 로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다 결국 로마의 손에 쓰러진 도시다. 팔미라는 남편이 죽고 아들과 자신의 제국을 세우려 했던 제노비아 여왕이 로마군에게 패배한 후 도시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 후 3세기 말부터 비잔티 시대를 거치며 현저히 쇠퇴하다가 11세기의 지진으로 그 흔적조차 매몰돼 버렸다. 현재의 모습은 1930년대 프랑스 탐험가의 발견 이후 복원된 일부분에 불과하다.
20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는 부서지고 쓰러졌지만 당시의 거대했던 도시의 모습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로마식 기둥이 늘어선 진입로 왼편으로는 대형 원형 극장이 상당 부분 복원돼 있고 극장 앞에는 사거리 개념의 테트라펠리온이 4개의 거대한 기둥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테트라펠리온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상점터를 비롯해 시장의 잔해가 남아 있고 오른편은 아직 복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팔미라 유적 바로 맞은 편에는 셈족의 태양신을 모시던 벨신전도 남아 있다. 한쪽 벽이 200m가 넘은 대형 신전으로 성벽이 잘 보존돼 있다.
지금은 유적이 돼 버린 팔미라의 서편으로는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무덤 골짜기가 있다. 지하 무덤외에 당시의 고관대작이 이용한 타워형태의 가족묘 등이 남아 있다. 팔미라는 한 눈에 내려볼 수 있는 아랍 성채도 있다.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여행이지만 황량한 모래 언덕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간혹 낙타를 방목하는 베두인들을 만날 수도 있고 신기루도 볼 수 있다. 모래가 해에 비쳐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신기루는 냉방 차량 안의 관광객도 착각할 만큼 진짜 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기루는 물이 보이는 주변에 나무가 없다는 점만 기억하면 속지 않을 수 있다.
팔미라를 100km 정도 앞두고 나오는 바그다드 카페도 재미나다. 시리아의 이 바그다드 카페는 영화와는 상관이 없는 일종의 고속도로 휴게소. 엄밀히 말하면 휴게소라기보다 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작은 찻집을 생각하면 된다. 카페에서는 여행객에게 커피와 차를 팔고 지도나 낙타인형과 같은 기념품도 판매한다. 한쪽에서는 사막의 유목민인 베드윈의 천막이 있고 베드윈 복장을 하고 기념 촬영도 해볼 수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의 유일한 휴게소로 명성을 얻기 시작해 지금은 유사한 카페들까지 생길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시리아 글·사진=김기남 기자 gab@traveltimes.co.kr
취재협조=루프트한자독일항공 02-3420-0470, 유로피카 02-738-6506
+++ 플러스 α +++
★중동은 생각보다 일교차가 큰 지역이다. 반바지, 반팔 차림으로 저녁을 맞으면 감기에 걸리기 쉽고 이동 중 차량의 냉방을 감안해서 항상 긴팔 남방이나 얇은 점퍼를 준비해 두자. 챙 넓은 모자와 썬그라스도 필수.
★레바논을 지나 시리아 국경 검문소를 넘기 직전에 새로 생긴 면세점이 있다. 물건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지만 술과 담배, 화장품 등 기본적인 품목은 갖추고 있고 무엇보다 다른 면세점에 비해 싸다. 말보로 담배 1보루가 2달러 정도 저렴한 미화 11달러 수준.
★팔미라의 테트라펠리온 기둥 4개 중 3개는 복원된 것으로 자세히 관찰하면 구분이 가능하다. 유적을 돌아보다보면 낙타를 타라는 베드윈들의 호객 행위가 집요하다. 정해진 가격은 없지만 어설프게 관심을 보였다가는 상당히 귀찮을 수 있다.
★시리아의 환율은 1달러에 50 파운드 정도이며 레바논에 비해 달러 사용이 수월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에서 쇼핑할 때는 미리 어느 정도 환전을 해두는 편이 좋다.
2005년 8월14일, 괜히 아침부터 들뜬 기분이다. 새벽 다섯시 일어나 호텔 주변을 몇 바퀴 돌고 벤치에 앉아 하루 일정을 더듬어 봤다. 갈 곳은 다마스쿠스 북쪽으로 215㎞ 떨어진 시리아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 26년 전, 한번 다녀온 곳이지만 모래 먼지 뒤집어쓰고 달려가 신전 터를 대충 둘러본 기억뿐이다. 그러나 이번 걸음은 사뭇 다르다.
아침 8시 출발해 두 시간쯤 달렸다. 사막 속에 운치있게 꾸민 ‘바그다드 카페’가 나타난다. 생 박하 잎을 띄운 홍차를 마시며 30분간 쉬었다. 얼마 안 가서 크네피스 마을의 모래언덕을 마구 파헤친 노천 인산염 채굴장이 보였다. 여기저기 녹슨 채굴기 잔해들이 나뒹군다. 팔미라는 한 시간을 더 달린 뒤 도착했다.
한사코 팔미라를 찾은 것은 실크로드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이다. 1877년 독일 학자 리히트호펜이 중국~중앙아시아~서북 인도 사이의 교역로 연변에서 고대 중국의 비단 유물이 발견된 사실을 중시해 이 길을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센’ 곧 ‘실크로드’라고 지었다. 뒤이어 독일의 동양학자 헤르만은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 동쪽 해안의 팔미라까지 이어지는 오아시스 곳곳에서 중국 비단 유물이 발견된 사실을 중시해 비단교역로를 팔미라까지 연장하고 ‘실크로드’(일명 오아시스로)를 재천명했다. 요컨대, 팔미라에서 비단이 발견됐으므로 실크로드는 오늘날처럼 지중해 동안까지 연장되었던 것이다.
팔미라는 동서남북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아나톨리아와 아라비아 반도를 연결하는 교통요지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분당 3㎥의 물을 뿜는 에프카 샘물을 비롯한 몇 개의 수원도 있어 시리아 사막 지역에서 유일하게 물이 넉넉하다.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주하고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했으며 대상 교역이 활발했다.
최초 기록인 기원전 2370년께 아카트 왕조의 점토판에는 지명이 ‘타드무르’로 씌어 있다. 〈구약성서〉에도 기원전 1000년께 솔로몬이 황야에 ‘타드무르’를 세웠다고 나온다. ‘타드무르’는 대추야자란 뜻의 고대 셈어 ‘타무르’에서 유래된 말로 지금도 아랍어 지명은 ‘타드무르’다. 흔히 쓰는 ‘팔미라’는 그리스·라틴어의 ‘대추야자’란 뜻으로 의역한 이름인 셈이다.
‘중동의 클레오파트라’ 제노비아 여왕
타드무르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치하에 들어갔다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동정을 계기로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받아 ‘팔미라’로 불리게 된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 로마제국 속지로 있었지만,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7만 대군이 이집트 원정까지 갈 정도의 국력을 지닌 왕국으로 컸다. 일세를 풍미한 마지막 여왕 제노비아가 로마군에 사로잡히는 비운을 맞으면서 약 300년간의 팔미라 영화는 끝났으며, 벨 신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오늘날 팔미라는 인구 3만에 10여㎢의 유적지가 있는 관광명소다. 도착 시간은 정오지만, 들머리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중국 비단 조각이 나왔다는 에라벨 탑묘로 향했다. ‘무덤 골짜기’의 탑묘군에 있는 이 묘는 부호 에라벨 일가가 103년 지은 탑 모양 무덤이다. 지하실과 지상 4층을 합쳐 높이가 2에 이르며, 약 300구의 주검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입구 윗면 바깥에 아치형 노대가 튀어나왔는데, 그 밑 석판에 무덤에 대한 설명문이 새겨져 있다. 층층마다 가로로 벽감을 파고 주검을 안치했으며, 동쪽 벽면에 사자 흉상을 그렸다. 한나라 때의 비단, 즉 한금(漢錦) 조각 여러 점들은 바로 이곳의 주검을 감싼 수의 속에서 나왔다. 한금은 날실로 무늬를 만들어 씨실을 감추는 날실 현문(顯紋)과 날실을 두드러지게 해 천이 밭이랑처럼 부푸는 이랑 무늬가 특색이다. 한금 유물은 기원 전후 한나라와 1만여 ㎞나 떨어진 시리아 사이에 진행된 교류의 일단을 입증한다. 〈위서〉 ‘서융전’에는 팔미라를 차란(且蘭) 왕국이라 지칭하면서 대진(大秦: 로마)에 예속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밖에 에라벨 탑묘 말고도 2세기 중반 지은 5층짜리 ‘3형제’ 탑묘와 아르타반 탑묘도 둘러봤다.
오후에는 팔미라박물관을 찾았다. 61년 개관한 구관을 3년 전부터 일본 쪽에서 직접 지원하고 증수해서 2주 전 새롭게 단장해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선사시대 뗀석기(타제석기)부터 팔미라 왕국 시대의 여러 신전 복원도까지 다양한 유물이 선보이는 중인데, 눈길을 끈 것은 2층에 전시된 한금 등 각종 견직 유물이었다. 놀라운 것은 진열장 태반이 일본 고고학팀 발굴품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70년부터 발굴에 참여해 지금은 벨 신전 한 모퉁이에 연구소까지 차려놓았다. 같은 동양학자로서 자부를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소외된 우리 현실에 자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팔미라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벨 신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기 32년 본전을 짓기 시작해 2세기 중엽까지 주랑, 정문, 주벽 등 부속 건물들을 완성했다. 이 그리스식 신전은 동서 길이 210m, 남북 20의 정방형이며, 가운데 본전은 동서 30m, 남북 5의 직사각형 석조 건물이다. 주위는 코린트식 열주가 에워싸고 있다. 본전 좌우 벽 감실에는 주신 벨을 중심으로 양옆에 월신인 아그리볼과 태양신 야르히볼이 있다. 본전은 4세기 이후 기독교회로, 7세기 뒤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썼는데, 흔적들이 오롯하게 남아 있다.
벨 신전을 나와 도시 유적 답사에 나섰다. 주요 유적들은 팔미라의 척추 격인 열주 도로를 따라 좌우에 촘촘히 있다. 동서로 뻗은 너비 11m의 열주도로는 길이가 1100m나 되며, 양쪽에는 높이 9., 지름 95cm의 코린트식 석주가 750개나 늘어서 숲을 방불케 한다. 기둥의 위쪽 끝에는 대상무역 유공자들의 석상을 얹으려고 만든 대좌(받침대)가 약간 튀어나와 있다. 대좌 밑에 공덕을 찬양하는 명문이 그리스·팔미라어로 새겨져 있다. 팔미라인들이 얼마나 교역을 중시했는가 하는 단적인 증거다. 이 도로의 기점은 200년께 세웠다가 1930년 복원한 아치형 개선문이다. 양쪽에 출입문 달린 개선문에 들어서서 열주 도로를 따라 나가다 보면, 오른쪽(북쪽)에 293~303년 지은 목욕탕이 나타난다. 좀 더 나가면 왼쪽(남쪽)으로 원형 야외극장에 이르게 된다. 전형적인 로마식 극장이다. 양옆에는 소음 차단벽도 설치했다고 한다. 극장 바로 곁에는 원로원 의사당이 붙어 있으며, 그 남쪽에 폭 84m, 길이 71m의 세관 건물이 있었다.
대상교역의 확대와 국고 증식을 위해 세관 업무는 매우 중요했다. 1881년 러시아의 한 여행자가 발견한 ‘팔미라 관세표’ 석비는 137년 그리스·팔미라어로 쓰여진 것이다. 표를 보면 주요 교역품은 귀금속, 향유, 올리브, 비단, 청동상, 물, 소금, 낙타 등이며, 세금 계산 단위는 낙타 한 마리가 실은 짐이다. 당나귀 한 마리분은 낙타 한 마리분 반액, 짐수레 한 대분은 낙타 네 마리분으로 계산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관과 세관표라고 한다.
유적 발굴 앞장선 일본의 연구소 눈길
다른 볼거리들도 많은 데, 교류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도로 중앙 교차점에 세운 4주문(테트라피론)이다. 네 개씩의 기둥으로 된 구조물 4개를 문기둥 삼은 건물인데, 석재는 이집트 나일강 상류 아스완에서 가져온 회색 화강암이다. 얼핏 봐도 팔미라 북쪽 채석장에서 캔 흰색 석회암 기둥들과는 다르다. 이 육중한 석재들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팔미라의 해돋이와 낙조를 보지 않고는 다녀왔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서쪽 디오클레티아누스 성채의 나지막한 언덕에 오르니 벌써 관광객들로 웅성거린다. 오후 6시50분, 장엄한 낙조가 사막의 지평선을 붉게 물들인다. 환호성이 터진다. 이튿날 새벽, 유서 깊은 벨 신전을 불그무레하게 물들인 해돋이도 뿌듯하게 맞이했다. 이렇게 우리는 팔미라의 흥망을 함께 지켜보았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사막의 꽃’ 팔미라는 실크로드에 남긴 로마 제국의 자취를 가장 생생하게 증거하는 도시다. 1~3세기 팔미라는 제국의 동방에서 실크로드 물류를 맥동시키는 ‘펌프’와도 같았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란 호라산을 거치거나 아라비아해, 페르시아만으로 들어온 인도, 중국 등지의 산물들은 대상 행렬에 실려 북서쪽 팔미라에서 한데 부려진 뒤 지중해변 도시를 거쳐 제국 곳곳에 퍼져갔다. 로마 귀족들을 눈멀게 한 비단 등 동방 사치품들은 이 길을 통해 교역의 꽃이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의 시리아 정벌로 제국의 강역이 된 이래 로마 황제들은 팔미라의 번영을 위해 애를 썼다. 최대 적국이자 실크로드를 틀어쥔 파르티아와 코를 맞댄 요지였으므로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키워야 할 도시였다.
그래서 제정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안티오키아와 다마스쿠스로 통하는 도로가 건설됐다. 5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는 129년 팔미라를 순행한 뒤 자치주 성격의 ‘시비타스 리베라(자유시)’를 선포했으며, 카라칼라(재위 211~217)는 아예 로마 시민권을 주고, 세금도 면제해주었다. 시리아 속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지중해, 소아시아, 유프라테스강 쪽으로 사통팔달한 ‘디오클레시아나 대로’, ‘신트라야누스 대로’가 통과하는 팔미라는 코린트 양식의 열주 건물과 대극장 등이 밀집한 ‘동방의 소로마’였다.
팔미라의 영화는 3세기 초 페르시아에서 파르티아가 몰락하고 이란 사산조가 등장하자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당장 실크로드 교역로가 막히자 팔미라는 로마 제국을 따돌리고, 홍해와 접한 이집트를 정벌해 아시아 교역로를 새로 닦았다. 그 주역이 바로 ‘중동의 클레오파트라’로 유명한 여걸 제노비아(사진)다. 원래 동방총독 오데나투스의 부인이던 그는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을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워 이집트, 소아시아 등에 걸친 독립 제국을 꿈꾸었다. 하지만 제노비아는 272년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 원정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로마로 압송되었고, 팔미라는 이듬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로마군의 철저한 파괴로 영영 스러져 버린다. 지금도 팔미라 옛 폐허에서는 밤마다 황금 투구를 쓰고 말을 탄 제노비아의 유령이 어슬렁거린다는 야담이 전한다. 로마는 팔미라를 황금빛 도시로 부흥시켰다가 스스로 파괴해버린 셈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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