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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중근동

[이란] 쉬라즈 파사르가드 고레스왕의 무덤과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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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스왕의 무덤과 무덤 입구

이 무덤에 사용되어진 돌들은 70km떨어진 곳에서 운반하였답니다. 

고레스왕은 지금 터키 지역의 리디아 오아국을 점령하고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바벨론까지 점령하고 페르시아를 비로소 세계를 통치하는 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전쟁을 위해 해외 원정 중 그 위대한 생애를 마치게 되었는데 커다란 석묘를 만들어 퍼써르 거드에 안치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줄을 때 묘석에 새겨 놓도록 한 유명한 글이 있다고 한다. 주전 330년 경 알렉산더 대제가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다리와 왕이 세운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거대한 왕궁인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는, 말을 타고 달려와서 페르시아의 건국자나 다름이 없는 고레스 왕의 궁을 불태우고 나서 내친김에 고레스의 석묘를 훼파하기 위해서 왔을 때 그 글이 눈에 띄기에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통역관은 "나 고레스는 한때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서 점령될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점령자여 그대도 언젠가는 누구에겐가 점령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묘를 건드리지 말아 주시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이 소리를 듣고 알렉산더 대왕은 말에서 내려 자신이 입고 있던 왕복을 벗어 고레스의 묘에 덮어 주었다고 한다. 

아마 그 유명한 알렉산더대왕의 유언 "내 관에 구멍을 뚫어 두 손을 밖으로 내 놓아라"는 말도 고레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 영원한 승자는 없디ㅏ. 천하를 손에 쥐고 흔들던 고레스 대왕도 알렉산더 대왕도... 모두 죽어 흙에 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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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라즈 SHIRAZ


쉬라즈는 복잡한 도시이며 항상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부로서 알려져 왔다. 호황기에는 배움의 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교육, 나이팅게일, 시, 장미, 와인과 동의어로 쓰였다. 쉬라즈는 또한 중세 이슬람 세계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고, 잔드 왕조(기원후 1747-1779년) 때에는 이란의 수도였으며 이 시기에 많은 수의 아름다운 건물이 지어지거나 재건되었다.


1893년의 책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의 일년’에서 에드워드 브로윈은 쉬라즈 인들을 ‘페르시아인들 가운데서, 가장 섬세하고, 가장 토속적이며, 가장 생기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쉬라즈는 여전히 시의 도시이고 하페즈와 사디의 무덤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보통의 이란 교통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쉬라즈의 온화한 기후와 한때 포도 농사에 쓰였던 비옥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이점으로 일년 연중 방문하기에 좋다. 화려한 정원과 아름다운 모스크, 고대 유적지의 속삼임은 페르세폴리스를 보고서 떠나기는 아쉽게 만든다.


쉬라즈의 볼거리는 아름다운 모스크와 역사적 중요성을 갖춘 무덤부터 작은 정원들까지 다양하다. 말 그대로 수천의 지역민들에 끼여 금요일에 산책을 하고 서구식 챰란 박사 가로수 길을 따라 소풍을 해보지 않았다면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역사 History


쉬라즈에는 적어도 아케메니드 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았지만 사산인들의 지배 아래 쉬라즈는 벌써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후 693년, 마지막 사산 왕조의 수도인 에스타크르(페르세폴리스 북동쪽으로 8km)를 아랍이 침략하기 전까지 쉬라즈는 수도가 되지 못했다. 1044년에 쉬라즈는 바그다드와 대적할 만큼 중요했고, 12세기 팔스의 아타바크인들 아래 더 발전하여 주요 예술 중심지가 되었다.


쉬라즈는 지배자가 조공을 바침으로써 몰골인과 절름발이의 티무르라는 뜻의 타메를란의 침략에도 살아남았다. 대 참사를 막은 쉬라즈는 몽골과 티무리드의 지배기에 가장 성공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개화한 지배자의 격려와 해페즈, 사이와 다른 많은 훌륭한 예술가와 학자의 존재로 인해 쉬라즈는 13, 14세기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 중 하나로 발돋움한다.


사피비드 시대 동안 지역의 수도로서 남아있었고, 심지어 쉬라즈의 유명한 와인을 수출한 몇몇 유럽 상인들을 끌어 모으기도 했지만 거의 100년간의 침체기에 접어든다. 여러 번의 지진과 18세기 초의 아프간 폭동, 1744년 쉬라즈 통치가의 반란과 나데르 샤가 포위 공격을 통한 진압으로 인해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1747년에 나데르 샤가 암살당할 당시 쉬라즈의 거의 모든 역사적 건물은 부서지거나 황폐해졌으며 인구가 50000명으로 줄어, 200년 전 인구의 1/4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쉬라즈는 개화한 지배자인 카림 칸의 지배아래 곧 풍요를 되찾게 된다. 카림 칸은 짧은 잔드 왕조의 첫 번째 지배자였고, 1750년에 쉬라즈를 국가의 수도로 삼았다. 사실상 모든 페르시아의 주인이었던 카림 칸은 바킬(섭정) 이상의 높은 타이틀을 거부했다. 그는 쉬라즈를 샤 마바스 1세 지매 아래의 에스파한에 버금가는 훌륭한 수도로 만들고자 했다.


카림 칸은 아르지 카림 카니 지역에 왕립 지역을 세우고 페르시아의 뛰어난 바자를 포함한 여러 아름다운 건물을 주문했다. 그러나 카림 칸의 후계자는 그의 재산을 지키는 데에 실패했고, 앙심을 품은 카자르 인들이 도시의 요새를 파괴해버렸다. 1789년에 그들은 수도와 카림 칸에 남아있는 것들을 테헤란으로 옮겼다. 지역의 수도로 강등되었지만 쉬라즈는 부시르로의 교육 루트로서의 중요성 덕분에 풍요로움을 유지하고 있다. 


교역이라는 쉬라즈의 역할은 1930년대에 이란을 통하는 기찻길이 개설 개설되어 교역 루트가 쿠제스탄의 항구로 이동함에 따라 엄청나게 쇠퇴하였다. 쉬라즈의 많은 건축 유산과 특히 잔드 왕조의 왕립 지역은 팔라비 왕조의 무분별한 도시 계획으로 무시되거나 파괴되었다. 산업적, 종교적, 전략적인 중요성을 잃어버린 쉬라즈는 1979년 폭동 이후 인구가 꽤 증가하기는 했지만 이제 행정의 중심지로의 역할을 주로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