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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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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옥스포드 크라이스트처치 '메이드 인 옥스퍼드(made in Oxford)', 지난 2백여 년간 배출한 영국 수상만 열여섯 명에 이른다. 낮은 분지에 세워졌지만 ‘옥스퍼드로 올라갔다’는 표현이 자연스레 통용되는 전통과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곳, 옥스퍼드에 들어섰다. 사진에서나 보았던 높고 낮은 첨탑의 위용을 자랑하는 고딕양식 건물 사이 골목길, 관광객들의 여유로운 걸음과는 대조적으로 잰걸음으로 강의실로 이동하는 범상치 않아 뵈는 학생들, 대로를 가득 메운 차량과 자전거, 오랜 세월동안 하나하나 들어선 예술품 같은 건물들의 무계획(?)한 배치는 과거와 현대가 모호한 경계선을 그리며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옥스퍼드는 40개의 칼리지(단과대학)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13~16세기에 설립됐다. 우리가 옥스퍼드를 찾은 이유는 ..
[스위스] 쯔빙글리 Zwingli(1484-1531)  쯔빙글리 Zwingli(1484-1531) 오덕교 , 이상규 발췌,요약 1484년 스위스의 작은 도시 빌트하우스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쯔빙글리의 부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던 쯔빙글리를 삼촌 바돌로뮤가 있던 베센으로 유학을 보내어 교육을 시켰다. 쯔빙글리는 10살까지 삼촌 집에 머물면서 공부하다가 먼 친척 뻘이 되는 뷘쯔리가 있던 바젤의 성 테오도어학교로 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당시의 학제를 따라 3년간 라틴어,변증법,음악을 공부하였다. 쯔빙글리는 1496년 베른대학에 입학하여 하인리히 뵐프린 밑에서 고전과 음악을 공부하던 중 비엔나 대학으로 전학하였다. 그곳에서 스위스의 인문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요아킴 바디안을 만나 인문주의 사상을 배웠고,1502년에는 바젤대학으로 전학하여 토..
[이탈리아] 프란체스코 ... 타락해 가는 교회에 '정화의 횃불'  ‘주여,나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소서’라는 기도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으로 일컬어진다.그의 거룩한 성품과 복음을 철저히 따른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본받으려 했던 참 제자의 길이었다. 그의 영성은 십자가의 신비의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난과 가난을 자청했던 그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입은 상처가 자신의 몸에 그대로 나타나는 ‘성흔’을 받기까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뤘다.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해가 1181년인지 1182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체스코(본명은 지오반니 디 베르난도네)는 젊은 시절에는 기사가 되길 꿈꾸며 인생을 즐겁게 보냈다. 하..
[이탈리아] 토마스 아퀴나스 ... 이성과 계시 / 자연과 은혜의 조화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뛰어난 신학자를 뽑는다면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꼽힐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는 도미니쿠스 학파의 가장 뛰어난 학자였다.로마교회 신학의 기초를 완성한 인물이었으며 그가 세운 토마스학교(Thomistic School)는 21세기인 현재까지도 건재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들,‘존재와 본질에 관하여’‘자연의 원리에 관하여’ ‘센텐티아 주석’ 그리고 ‘신학총론’ 등은 그 양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그는 ‘교회의 박사’‘천사의 박사’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베네딕트 수도원 몬테카시노에서 수학한 후 나폴리에서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접했다.1244년 도미니코 교단에 들어가면서 그 이듬해 파리에서 알베르트 마구누스의..
[영국] 존 웨슬리 ... '나눔의 신앙공동체'를 생활속으로  한국교회의 교회제도는 칼뱅의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가 지배해왔다. 그래서 감리교회나 성결교회,순복음교회도 모두 장로제도를 두고 있다. 감리교회마저도 담임목사를 감독과 감리사가 파송하는 게 아니라 교회 구역인사위원회의 3분의 2 찬성으로 초빙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신학은 자유주의도,근본주의도,신정통주의도 아닌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였다. 새벽기도회,철야기도회,속회나 구역예배,부흥회 등은 모두 웨슬리의 전통에서 나왔다. 한국의 성도들은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는 ‘마음의 종교(religion of heart)’를 선호하는 데 그것은 웨슬리에게서 나온 신앙 유형이다. 그 이유는 한국 최초의..
[영국] 존 녹스 ... 영국 종교개혁 이끈 '변혁의 전도사' 맨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 영국과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신앙과 독립을 지켜낸 사람,그가 존 녹스이다.그가 땅에 눕혀질 때,당시 스코틀랜드의 섭정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 여기에 누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초기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1514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으리라는 것을 알 뿐이다.1540년에 그는 사제직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고위 당국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불러내어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게 하셨다.그가 언제 개혁 신앙으로 회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그러나 그가 조지 위셔트(George Wishart)와 관계를 맺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위셔트는 곳곳에서 개혁 신앙을 외쳤고 같은 생..
[영국] 조지 뮐러 ... 고아 살핀 '65년간의 기도' ... 하늘의 응답 오늘의 성도들은 조지 뮐러라는 이름을 들으면 ‘5만번의 기도응답’‘영국 고아의 아버지’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는 수많은 예화의 주인공으로 오늘도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뮐러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한 신앙인일 뿐만 아니라 영국을 넘어 전세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초교파 공동체 운동인 ‘형제단’을 설립해 교회 개혁의 원형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뮐러가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주무대는 영국 브리스톨의 고아원이었다. 뮐러가 고아원을 시작한 데는 고아들에 대한 연민 이상의 결심이 있었다. 뮐러가 살았던 19세기 유럽은 인본주의 철학과 자유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신은 필요없다’는 자만이 팽배했다. 뮐러는 이런 불신앙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은 과거와 오逑構?지금도 역..
[영국] 안셀무스 ... '알기 위해 믿어라' 이성적 외침 ‘하나님의 숙소’‘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불리는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은 성경의 이야기와 성자들의 삶을 그린 아름답고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하다. 6세기말 선교사 어거스틴이 영국 왕을 개종시키고 캔터베리에 대성당을 세워 그곳의 감독으로 활동하였다.2번의 화재로 초기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중세에 들어서서 지금의 고딕양식 건물이 완성되었다.영국의 교회사와 수명을 같이하고 있는 캔터베리 대성당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 다음 가는 지위를 얻고 있다. 안셀무스는 바로 이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다.그는 신앙과 이성,초자연과 자연을 조화하려 했던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이성으로서 설명하려고 감행하기도 전에 먼저 믿어버리고 나서는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