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티레·Tyre)는 예루살렘 서북쪽 약 226㎞ 지점,악고 북쪽 약 45㎞ 지점,레바논의 시돈에서는 남쪽으로 약 40㎞ 떨어진 곳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국경에서는 불과 20㎞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지만 이스라엘에서 레바논으로 넘어가는 국경이 없어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거치거나 요르단을 통해 들어가야만 한다.
나는 항공편으로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은 후 지중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갔다. 40㎞쯤 달리자 시돈이 나타났고 다시 5㎞쯤 달려가자 내륙쪽으로 막두세의 만타라 동굴이 있는 산위에 세워진 성당이 보였다.
현지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은 예수께서 수로보니게(두로와 시돈 지역) 지역을 방문하여 한 여인의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고쳐 주셨는데(막 7:24∼30) 그때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을 따라왔다가 이 동굴에 머물렀다. 두로로 내려가는 길에 잠시 이곳에 올라와보니 거대한 마리아상이 세워져 있었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니 그 옛날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던 베니게의 유명한 상인들이 생각났다. 곧바로 사진을 찍고 다시 남쪽에 있는 사르밧을 거쳐 두로로 향했다.
두로에서 불과 6㎞ 떨어진 곳에 카브르 히람이라 부르는 두로 왕 히람의 석관이 길가에 놓여 있었다. 비록 알아주는 이 없이 쓸쓸히 석관만 남아있었으나 그 옛날 다윗 왕과 절친했던 히람은 다윗이 죽은 후에도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에게 인력과 백향목을 보내준 두로의 왕이었다. 잠시 히람의 석관을 촬영한 뒤 곧 두로에 도착했다.
아직까지 사자의 도시로 불리는 두로의 로마 유적지에는 오늘날 공설운동장과 같은 히포드럼이 솔로몬 때 건설된 아치형의 수로 유적 옆에 남아있다. 지금은 현대 건물들로 인해 항구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길이 막혀 있으나 옛날에는 항구로 가는 길이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로마 유적지를 둘러보고 옛 항구로 갔다.
두로왕 히람이 건설했다는 해안가의 유적지에 도착하자 유적지 너머로 지중해의 수평선이 펼쳐졌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자 아직도 원주 기둥들이 상당히 남아있고 발굴해놓은 유적들이 그 옛날 두로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베니게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성서의 도시 두로는 오늘날 반도에 위치한 수르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본토와 맞은편 섬에 두로 성읍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토사가 쌓여 지금은 반도로 바뀌었다. 본래 이 둘을 합해서 두로라고 했으나 두로의 중심 성읍은 섬에 있는 것이다(겔 28:2).
이 섬의 옛 항구는 남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방파제가 수면 밑 15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 방파제는 히람왕(솔로몬 왕과 동시대)에 의하여 BC 10세기에 축조되었다. 길이가 897m이고 너비가 9.8m이다. 두로는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소아시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이자 중심 무역항이었다.
두로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 부요해지자 국방을 강화하고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다(겔 27:25 참조). 그리고 두로 왕 히람은 백향목과 함께 목수와 석공들을 보내 다윗이 왕궁을 짓는 데 협조했으며(삼하 5:11) 솔로몬 왕 때에는 레바논산에서 벌채한 백향목을 뗏목으로 만들어 지중해 남쪽에 있는 욥바로 보내 성전 건축을 도왔다(왕상 5:10).
그러나 이런 두로도 “부귀 영화가 한여름 밤의 꿈같이 물속에 잠기고 그물 말리는 한적한 어촌이 되리라”(겔 26:14)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옛 항구터에는 바닷물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때 비참한 종말을 맞고 무역의 왕자 자리를 시돈에 내주었다. 이후 느헤미야 시대에 다시 회복되었으나(느 13:16) 7개월 동안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함락됐다.
신약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꼭 한번 두로와 시돈 지경에 들렸으며 이때 귀신 들린 이곳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다(마 15:21∼28). 또 두로 지방인들은 교만한 헤롯에게 아첨했다(행 12:20∼25). 그리고 바울이 제자들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곳도 이곳이다(행 21:3∼4).
베니게 지역의 히람 왕이 세운 무역의 도시 두로. 그러나 오늘날 부의 상징이었던 옛 항구터는 사라지고 바닷물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부로 인한 사치와 환락의 도시 두로는 이렇게 사라지고 아직까지도 레바논의 영화는 오지 않고 있다.
유적지에는 로마와 헬레니즘 시대 등 다양한 역사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으며 그리스산 대리석과 이집트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기둥을 통해 당시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히 이뤄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티르에는 길이 480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마차 경기장도 남아 있다.
나는 항공편으로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은 후 지중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갔다. 40㎞쯤 달리자 시돈이 나타났고 다시 5㎞쯤 달려가자 내륙쪽으로 막두세의 만타라 동굴이 있는 산위에 세워진 성당이 보였다.
현지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은 예수께서 수로보니게(두로와 시돈 지역) 지역을 방문하여 한 여인의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고쳐 주셨는데(막 7:24∼30) 그때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을 따라왔다가 이 동굴에 머물렀다. 두로로 내려가는 길에 잠시 이곳에 올라와보니 거대한 마리아상이 세워져 있었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니 그 옛날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던 베니게의 유명한 상인들이 생각났다. 곧바로 사진을 찍고 다시 남쪽에 있는 사르밧을 거쳐 두로로 향했다.
두로에서 불과 6㎞ 떨어진 곳에 카브르 히람이라 부르는 두로 왕 히람의 석관이 길가에 놓여 있었다. 비록 알아주는 이 없이 쓸쓸히 석관만 남아있었으나 그 옛날 다윗 왕과 절친했던 히람은 다윗이 죽은 후에도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에게 인력과 백향목을 보내준 두로의 왕이었다. 잠시 히람의 석관을 촬영한 뒤 곧 두로에 도착했다.
아직까지 사자의 도시로 불리는 두로의 로마 유적지에는 오늘날 공설운동장과 같은 히포드럼이 솔로몬 때 건설된 아치형의 수로 유적 옆에 남아있다. 지금은 현대 건물들로 인해 항구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길이 막혀 있으나 옛날에는 항구로 가는 길이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로마 유적지를 둘러보고 옛 항구로 갔다.
두로왕 히람이 건설했다는 해안가의 유적지에 도착하자 유적지 너머로 지중해의 수평선이 펼쳐졌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자 아직도 원주 기둥들이 상당히 남아있고 발굴해놓은 유적들이 그 옛날 두로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베니게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성서의 도시 두로는 오늘날 반도에 위치한 수르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본토와 맞은편 섬에 두로 성읍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토사가 쌓여 지금은 반도로 바뀌었다. 본래 이 둘을 합해서 두로라고 했으나 두로의 중심 성읍은 섬에 있는 것이다(겔 28:2).
이 섬의 옛 항구는 남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방파제가 수면 밑 15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 방파제는 히람왕(솔로몬 왕과 동시대)에 의하여 BC 10세기에 축조되었다. 길이가 897m이고 너비가 9.8m이다. 두로는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소아시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이자 중심 무역항이었다.
두로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 부요해지자 국방을 강화하고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다(겔 27:25 참조). 그리고 두로 왕 히람은 백향목과 함께 목수와 석공들을 보내 다윗이 왕궁을 짓는 데 협조했으며(삼하 5:11) 솔로몬 왕 때에는 레바논산에서 벌채한 백향목을 뗏목으로 만들어 지중해 남쪽에 있는 욥바로 보내 성전 건축을 도왔다(왕상 5:10).
그러나 이런 두로도 “부귀 영화가 한여름 밤의 꿈같이 물속에 잠기고 그물 말리는 한적한 어촌이 되리라”(겔 26:14)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옛 항구터에는 바닷물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때 비참한 종말을 맞고 무역의 왕자 자리를 시돈에 내주었다. 이후 느헤미야 시대에 다시 회복되었으나(느 13:16) 7개월 동안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함락됐다.
신약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꼭 한번 두로와 시돈 지경에 들렸으며 이때 귀신 들린 이곳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다(마 15:21∼28). 또 두로 지방인들은 교만한 헤롯에게 아첨했다(행 12:20∼25). 그리고 바울이 제자들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곳도 이곳이다(행 21:3∼4).
베니게 지역의 히람 왕이 세운 무역의 도시 두로. 그러나 오늘날 부의 상징이었던 옛 항구터는 사라지고 바닷물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부로 인한 사치와 환락의 도시 두로는 이렇게 사라지고 아직까지도 레바논의 영화는 오지 않고 있다.
유적지에는 로마와 헬레니즘 시대 등 다양한 역사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으며 그리스산 대리석과 이집트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기둥을 통해 당시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히 이뤄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티르에는 길이 480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마차 경기장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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