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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이스라엘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주전 323년은 중동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해였다. 역사의 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젊은 나이에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오늘날 이라크의 바벨론에서 알렉산더가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을 때 그가 남겨놓은 거대한 제국은 어느 누구도 홀로 통치할 수 없는 광활한 영역이었다. 자연히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에 통치 영역이 분할되었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게 돌아갔고 그는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프톨레미 왕조를 이루었다. 또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지역은 셀레우코스 장군에게 할당되었고 안디옥(안티오크)을 수도로 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이루었다.

이들 희랍의 통치세력 사이에 위치한 것이 유대인들의 땅 팔레스타인이었다. 약 100년 이상 팔레스타인 지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관용주의 정책으로 정복민들을 다스렸고 이들의 통치기간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평온을 유지했다.

그러나 주전 200년께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양대 세력이 쟁탈전을 벌였다. 결과는 셀레우코스 왕가의 승리였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셀에우코스 왕가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가의 통치 정책은 정복지 내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희랍문명(헬레니즘)으로 통일시키는 ‘희랍문명 통일화’ 정책이었다. 특히 주전 170년대 안티오쿠스 4세는 강력한 희랍화 정책을 추진했다.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정책의 추진은 곧 종교적 탄압의 형태로 나타났다. 안티오쿠스 4세는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행해온 할례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긴 어머니는 아기와 함께 처형되었다.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게 했고 성경책(당시는 모세5경)을 소지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발견된 성경책은 불에 태워 없애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유대인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을 격분시킨 것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희랍의 최고신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을 세우게 하고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희랍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전 167년 유다지역의 작은 마을 모디인(Modiin)에서 유대인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저항운동은 유대인 하스몬(Hasmon) 가문에 속한 ‘마타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주동이 되어 시작되었다. 이들이 항거의 기치를 내걸자 많은 유대인이 그들 주변에 모여들었고 결국 혁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혁명의 지도자는 마타디아의 다섯 아들 중에 ‘유다’였다. 그의 별명은 ‘쇠망치’라는 뜻의 ‘마카비’(Maccabee)였다. 사람들은 그를 ‘유다 마카비’라고 불렀고 그가 주도하는 혁명은 ‘마카비 혁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카비 혁명군은 안티오쿠스 4세의 군대에 비해서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 지형과 지리에 익숙하다는 강점을 살려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승리의 전기를 잡아나갔다. 3년간의 투쟁 끝에 ‘유다 마카비’가 이끄는 혁명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곧 성전산 위에 세워진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의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제거하여 정화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전을 새롭게 봉헌했다. 이 날이 구약시대 월력으로 키슬렙(Kislev)월 25일이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이날을 ‘하누카’(Hanukkah) 절기로 지켜오고 있다. 성전을 ‘봉헌’했다는 뜻이다. 우리의 달력으로 12월 중순쯤이 되는 하누카 절기에는 유대인 가정이나 회당에서는 ‘하누카 촛불’을 켠다. 8개 촛대에 매일 저녁 하나씩 촛불을 켜 나가서 마지막 여덟째 날은 8개 촛불이 모두 켜진다. 이러한 촛불의식에는 유래가 있다. ‘유다 마카비’가 혁명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성전을 밝히는 등불의 기름이 하루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성전에서 사용하는 성유를 만들려면 여러 날이 걸리는데 기름이 하루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유가 만들어질 때까지 하루치 기름은 기적적으로 8일간이나 성전을 밝혔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하누카 절기에 촛불을 켜는 의식이 생겨났다. 그래서 하누카를 일명 ‘빛의 축제’(Feast of Lights)라고도 부른다.

마카비 혁명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셀레우코스 왕가는 예루살렘 성전의 관할권을 유대인들에게 이양해 주었고 이로써 마카비 혁명은 일단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유다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은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독립이었다.

셀레우코스 왕가와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서 ‘유다 마카비’는 전사하고 그의 동생 ‘요나단’이 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돼 스스로 ‘대제사장’의 위치에 올랐다. 당시 대제사장은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최고 지도자의 위치였다.

요나단의 뒤를 이은 지도자는 그의 형 시몬이었다. 시몬은 유능한 지도자였고 셀레우코스 왕가와 협상 끝에 유대인들이 희랍의 통치자에게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유다왕국이 멸망한지 450여년만에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주전 140년). 이로써 하스몬 가문의 세습적 통치가 시작되었고 80년간 유대인들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해나갔다.


주전 160년대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마카비 혁명’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대지역을 통치하던 희랍계 ‘안티오쿠스’ 왕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희랍의 최고신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세워 성전을 더럽히고 안식일과 할례를 금지하는 등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대항해서 분연히 일어선 것이 마카비 혁명이었다. ‘하스몬’ 가문에 속한 ‘유다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의 주도로 시작된 이 혁명은 3년간에 걸친 투쟁 끝에 승리했고 예루살렘 성전은 정화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종교적 탄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하스몬 가문의 형제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하스몬 가문 제2세대에 와서 하스몬 가문 지도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직 뿐만 아니라 세속적 통치권까지 장악하고 실질적인 정치적 독립을 성취하게 되었다(주전 130년대).

하스몬 가문이 종교권과 정치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반대파들은 하스몬 가문이 정치세력화되고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권까지 모두 움켜쥐는 것은 마카비 혁명 정신을 변질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바리새’(Pharisees)파였다.

바리새파에 대항해서 하스몬 가문의 통치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세력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사두개’(Sadducees)파였다. 사두개파는 주로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 상인,제사장 계층으로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바리새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스몬 가문 통치 제3세대때 하스몬 왕가가 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1세?주전 104년께)는 스스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유대인 공동체는 왕이 통치하는 ‘유대왕국’이 되었다.

한편 하스몬 왕가에 대한 바리새파의 반대는 더욱 격렬해졌고 반란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 통치자 ‘알렉산더 얀나이’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바리새파 대표를 불렀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바리새파 대표들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죽는 것이요.”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스몬 왕가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느 권력이든 권력의 붕괴는 흔히 내분에서 시작되었다.

27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알렉산더 얀나이’가 죽었을 때(주전 78년) 그의 두 아들 사이에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승자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였다. 패배한 형 ‘힐카누스’는 나바트인들의 암벽도시 페트라(Petra)로 피신하고 나바트인들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두 형제가 왕의 자리를 놓고 피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이 로마제국의 폼페이(Pompey)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 지역에 진주했다. 왕의 자리에 눈이 먼 두 형제 ‘아리스토불루스’와 ‘힐카누스’는 어리석게도 다마스쿠스(다메섹)에 머무르고 있는 폼페이 장군에게 각각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는 웃지 못할 일을 벌였다.

마침내 주전 63년 폼페이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단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함락된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폼페이 장군은 ‘힐카누스’의 손을 들어주고 대제사장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스몬 왕가가 이끄는 ‘유다 왕국’은 사라진 뒤였다. 유대지역은 로마제국의 속주로 전락한 것이다. 마카비 혁명의 승리로 시작된 하스몬 가문의 통치는 이렇게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100년 남짓 계속 된 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로마제국은 정복지의 내부적 문제에 가급적 자치권을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로마제국은 유대지역 통치를 위해 ‘이두매’(에돔) 지역 출신 헤롯에게 왕권을 부여해주었다(헤롯의 재위기간 주전 40∼4년). 헤롯의 부인은 하스몬 왕가에 속한 ‘마리암’이었다. 헤롯이 왕이 되자 그는 무자비하게 하스몬 가문을 제거하였다. 혹시 있을지 모를 하스몬 왕가 복권운동을 분쇄하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서 헤롯왕은 하스몬 왕가 출신인 자기 부인까지 죽이는 잔인성을 보였다.

헤롯왕은 처음부터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유다의 남부 ‘이두매’ 지역 출신이었고 특히 하스몬 왕가에 대한 그의 잔인한 처사는 유대인들의 등을 돌리게 했다. 아무리 고대사회라고 해도 힘만으로 통치할 수는 없었고 어느 정도 피통치자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헤롯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살 궁리를 했고 마침내 묘안이 떠올랐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재건축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었다.

우선 헤롯 왕은 성전이 서 있는 성전산 구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사방에 높이 20m에 달하는 축대를 쌓아 성전산 구역을 확장해서 4만평에 이르는 넓은 대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넓은 대지 위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했다. 헤롯은 폭군이었으나 세심한 면도 있었다. 성전을 재건축하는 과정에 인부와 석공들이 성전산의 성역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1000명에 달하는 제사장들을 석공으로 훈련시켜 제사장들을 성전 건축공사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성전공사가 끝났을 때 성전산 위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졌다. 예수님께서도 “큰 건물들”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대성전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헤롯 성전’이라고 부른다.

헤롯 성전은 웅대하고 장엄한 성전이었으나 폭군 헤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서기 70년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주전 63년은 유대인들의 기나긴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 해였다. 당시 유대인들을 통치하던 하스몬 왕가에 내분이 일어나 권력 투쟁에 영일이 없는 사이 로마 제국의 폼페이 장군이 유대지역으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것이다. 이로써 마카비 혁명 이후 약 100년간 지속돼왔던 하스몬 왕가의 유대인 독립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예속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은 통치 초기에는 헤롯이라는 인물을 유대인의 왕의 자리에 앉히고 내정문제에 대해서는 헤롯 왕가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허용했다. 그러나 서기 6년부터는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바로 이때 유대 땅에서는 인류 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복음 전파,십자가 고난과 부활,승천,그리고 교회의 발생과 기독교 선교 역사의 시작이었다.

로마 제국이 총독을 파견하여 유대지역을 통치하던 시기에 유대인들과 총독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더욱이 로마 주둔군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충돌이 잦았다. 이런 와중에 유대인들의 로마 통치자들에 대한 불만과 적대감정이 누적되었고 과격한 반로마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반로마 운동의 주축은 ‘열심당원(Zealots)’들이었다. 또한 단검을 몸에 품고 다니면서 로마제국에 협력하는 유대인들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던 ‘단검자객단’(Sicarii)까지 생겨났다.

서기 66년 이런 상황에서 플로루스(Flours)라는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했다. 그는 어리석게도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에서 큰 돈을 빼내려고 했다. 물론 구실은 공용으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로마제국 통치자들에 대한 항거운동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의 항거는 곧 대규모 반란으로 확산되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제1차 유대인 반란’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로서는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유대인의 반란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서기 67년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에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베스파시안 장군은 실전 경험이 많은 유능한 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이집트에 주둔해 있던 그의 아들 티투스(Titus)를 반란진압에 동참시켰다. 부자가 이끄는 로마 군단은 6만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노련한 베스파시안 장군은 북부지역인 갈릴리 지역부터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서서히 예루살렘 방향으로 남진했다.

유대인 반란이 진압돼가는 과정에서 로마에서는 폭군 네로가 자결하는 일이 일어났고 1년 사이에 로마 황제가 무려 4명이 교체되는 ‘4황제의 해(The Year of Four Emperors)’가 뒤따랐다.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등이 차례로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나 곧 살해되거나 자결하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유대인 반란 진압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추대되었고 69년 그는 로마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은 유대인 반란 진압의 책임을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맡겼다. 당시 티투스는 29세의 젊은 나이였으나 능력 있는 장군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예루살렘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스코푸스 산(현재 히브리대가 위치해 있음)과 감람산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예루살렘 공격을 개시했다. 예루살렘 공격 작전이 시작된지 5개월만에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로마군대가 밀물처럼 성안으로 들이닥쳤다. 저항하던 유대인 반란군은 투항을 거부하고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들어가 끝까지 항거했다. 로마 군사들은 성전에 횃불을 던지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성전은 화염에 휩싸였다. 사실 티투스 장군은 성전 파괴까지는 계획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반란군을 진압한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산에 올라가 폐허로 변한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솔로몬 성전 파괴 이후 재건된 ‘두번째 성전(헤롯왕이 증축한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서기 70년). 기묘하게도 바벨론 군대에게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날(주전 587년)과 70년 로마 군대가 두번째 성전을 파괴시킨 날이 거의 일치한다. 유대인 달력으로 아브달(서양력으로 8월) 9일쯤이다. 오늘날도 ‘티샤 베아브(Tisha beAv?아브달 9일이라는 뜻)’ 날이 되면 모든 유대인들은 금식하며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면서 성전이 파괴된 날을 기억한다.

성전은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파괴되었으나 축대 부분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남아있어 이를 ‘통곡의 벽’이라 부른다.

로마 제국 시대 그들의 관습 중의 하나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과 병사들이 로마 거리에서 ‘승리의 행진’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81년 로마에 세워진 ‘티투스 장군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일곱 촛대와 나팔들을 어깨에 메고 로마 군사들이 승리의 행진을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유대인들의 비극적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박준서교수(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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