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바빌론의 신관이자 역사가 베로수스는 인간들이 원래는 한 민족이었으나 다음과 같은 사건 때문에 언어가 달라지고 다른 민족으로 나누어졌다고 기록했다. "최초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너무 믿어 신을 경멸하고 자신이 신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오늘날 바빌론이 있는 곳에 높은 탑을 쌓았다. 이 탑이 하늘에 닿으려 할 때 갑자기 신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해 탑을 무너뜨렸다. 탑의 폐허는 바벨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사람들은 이때까지 같은 언어를 사용했는데, 신은 이들로 하여금 다른 언어로 말을 하게 만들었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이와 비슷한 얘기가 등장한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바벨탑의 규모에 대해 언급했다. 과연 바벨탑은 실재로 존재했을까.
바벨탑처럼 각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킨 것은 드물다. 신들이 인간의 도전에 대한 대비책으로 인간의 언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건설중인 탑을 파괴한다는 전설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벨탑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실재로 존재하는 탑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지구라트라는 건축물이 존재한다. 바벨탑은 바빌론에 지어진 지구라트의 하나일 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풍요로운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3000-500년 사이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모시는 수백개의 지구라트를 만들었다. 바빌론, 우르크, 우르와 같은 주요 도시들은 도시 중앙에 거대한 지구라트를 갖추고 있었다. 현재 유적이 확인된 것만 해도 30곳 이상이다. 지구라트는 위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작아지는 단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탑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지구라트는 우르에서 발견됐다. 이 지구라트는 기원전 1천2백년 경에 건설됐다. 5단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50m다. 꼭대기에 있는 신전은 신관만이 출입할 수 있고, 일반인은 1단까지만 접근이 허용된다. 이 지구라트에서 올려지던 특수 의식에 대한 전설은 지구라트가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됐음을 말해준다.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엄선된 한쌍의 남녀는 지구라트 위의 신전 앞에서 엄숙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식이 끝나면 부부와 수행원, 그리고 가족들은 신전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두개의 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신랑과 신부는 성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들이 관속에 뉘어지면 수행원들도 독약을 마시고 부부를 따라간다. 곧 가축들을 죽여 제물로 바친 후 무거운 돌문을 닫는 것으로 의식은 끝난다. 이들의 성스러운 죽음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신들의 은총이 내려져 풍요와 영원한 삶이 보장된다.
그러나 모든 지구라트에서 인간을 제물로 희생시킨 것은 아니다. 지구라트는 신들이 내려와 축복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든 건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홍수에 휘말리고 작열하는 태양의 불볕에 시달리는 세계에서 인간이 신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쉽게 이해가 간다. 지구라트를 만든 동기가 신의 강림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이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여기서 유명한 바벨탑이라 불리는 지구라트를 생각해보자. '바벨'은 '신의 문'이라는 뜻으로, 유태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바벨탑을 처음 발굴한 사람은 독일의 콜데바이다. 그는 1913년 바빌론을 발굴하던 중 도시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탑 유적의 토대에서 기원전 229년에 새겨진 점토판을 발견했다. 점토판에 따르면 탑은 7층이고 그 위에 사당이 설치돼 있었다. 몇가지 자료를 종합해 조사한 결과 바벨탑을 세우는데 모두 8천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으며, 건물의 규모는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가 약 90m에 달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렇듯 바벨탑의 규모는 다른 지구라트보다 훨씬 크다. 이런 거대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바빌론이 다른 도시들을 압도할 정도로 정치·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바빌론의 외곽 둘레의 길이는 16km에 이르렀고, 폭 27m에 달하는 도시의 내벽을 따라 경계탑들이 서있었다. 도시 한편으로는 유프라테스강이 흘러 천연의 방어선을 이루었다. 도시 안에 화려한 궁전이 수없이 지어졌고, 한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공중정원도 성 안에 있었다.
바벨탑은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을 점령했을 때 폐허가 된 바벨탑을 재건하려 했지만, 너무나 거창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만여명의 인원이 2개월 간 투입된 후의 일이었다.
▲ 기원전 13세기 엘람왕국이 신전으로 초가잠빌에 축조한 지구라트
이란 초가잠빌...기원전 1250년경 피라미드 형태로 건축
인류문명이 처음 태어난 메소포타미아 땅에는 나무도 돌도 흔치 않았다. 점성이 강한 찰흙만 있을 뿐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비옥하기 짝이 없는 그 땅에 씨앗을 뿌려 곡식을 재배했고, 또 그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집과 신전 등을 지었다.
나일 강변의 고대이집트인들이 그곳에 흔한 돌을 이용하여 '돌의 문명'을 이룩한 것과는 달리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유역의 평원에 살았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흙의 문명'을 건설했다. 흙은 물과 바람에 약하다고는 하지만 4000~5000년 전 그들의 축조물들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는데, 이라크 남부의 우르(Ur)란 곳에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이를 지구라트ziggurat라 부른다)의 신전 유적은 그 대표적 유적으로 꼽힌다.
지구라트는 오랫동안 축조되었는지 이라크와 가까운 이란의 서남부 초가잠빌(Tchoga Zambil)이란 곳에도 그게 남아 있는데, 우르의 것보다 더 정교하고 보존상태 또한 더 양호하다.
기원전 16-11세기 이 일대를 차지했던 엘람왕국이 그들의 최고신 인슈시나크를 위해 기원전 1250년경에 세운 것이라 그런 모양인데, 세월의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지 원래 5층 구조였던 것이 지금은 3층 구조에 28m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평탄한 대지 위에 홀로 서 있는 것인 데다 규모가 대단하여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곳이 페르시아어로 ‘높다랗게 솟아있는 산’이란 뜻의 초가잠빌이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페르시아제국의 수도였던 수사(Susa)에서 45km 떨어진 아주 황량한 평원 위에 서 있는 지구라트는 규격 흙벽돌을 가지런히 쌓아올려 지은 것이라 모든 것이 반듯했고, 입구에는 아치형 문틀과 문을 달았던 돌쩌귀도 남아 있어 왕과 제사상만이 출입한 듯했다. 그러나 정상은 허물어진 상태 그대로라 원래 무엇이 있었고, 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우르의 것은 아직까지 세계문화유산에 올리지 않은 유네스코는, 어쩐 일인지 이곳은 세계유산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79년 지정했다.
▲ 정보
초가잠빌은 그리 알려져 있지도 않은데다 외진 곳에 있어 찾기도 쉽지 않다.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에 따르면 주위에 군부대가 있어 현장 접근이 어렵다고 되어 있으나 테헤란에서 수사까지만 가면, 큰 문제는 없다. 거기서 택시로 쉽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테헤란과 수사 사이엔 비행기와 버스가 운행된다.
메소포타미아 및 엘람(이란 서부)의 고대도시에 설치된 층계 모양의 성탑(聖塔).
신전(神殿)에 부속되어 있다. 지구라트의 정의나 성립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에리두(Eridu) 11층 이후의 신전, 우루크(Uruk)의 <아누의 지구라트>, 혹은 하파제의 <타원 신전> 등, BC 3000년대 전반 이전의 기단이 있는 신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우르(Ur) 제3왕조의 수립자인 우르남무(Ur-Nammu)의 지구라트에서 기본적인 형을 거의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르남무는 우르·우르크·니푸르(Nippur)·에리두에 지구라트를 세웠는데 이 중 유명한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단 위의 신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이 있는 곳(높은 곳의 신전)과 인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낮은 곳의 신전)라는 종교개념의 확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뒤의 지구라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 시대(BC 1365~BC 609), 북메소포타미아의 각 도시에 조영(造營)된 지구라트에는 계단 대신에 경사로(傾斜路)가 설치되었다. 6개의 신전에 부속되어 있는 코르사바드의 지구라트는 4층만 남아 있는데 그 당시는 7층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엘람에서도 초가잔빌에 BC 13세기에 5층의 기단이 있는 인슈시나크신(神)의 지구라트가 건조되었다. 이와 같은 지구라트를 축조할 때에는 속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겉마무리 쌓기에는 구운 벽돌을 쓰고, 역청(瀝靑) 등을 모르타르로 사용하였다. 또한 표면의 채색은 채유(彩釉) 벽돌로 하였다. 한편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에 있어서 <산>의 개념과 결부되어 고대의 종교관·우주관의 복원(復元)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그 명칭에 대한 고찰은 고고학적 자료와 함께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데, 바빌론 지구라트의 명칭인 에테멘안키(é-temen-an-ki;하늘과 땅의 초석인 집)는 그 한 예이다. 또한 수메르어(語)에서 지구라트를 나타내는 말은 에우니르(é-u-nir;놀라운 집)이며, 구데아(Gudea)의 비문에 등장하는 에파에우브이 민나(ê-pa-ê-ub-iminna;지구라트, 즉 7지방의 신전)도 7층의 지구라트를 상기시키는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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