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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행전’ 바닷길서 밀알을 찾다… 신안 증도로 떠나는 성지순례 모세의 기적처럼 순식간에 바닷물이 물러난다. 증도와 화도를 갈라놓았던 바다가 사라지자 무명천을 풀어놓은 듯 노두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문준경 전도사가 한 손에는 성경책을, 한 손에는 의약품과 사탕이 든 보따리를 들고 건너던 복음의 바닷길이다. 그녀가 순교한 지 어언 60년째. 시계바늘조차 천천히 도는 슬로시티 증도가 ‘천국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다. 전남 신안 앞바다의 섬 증도를 ‘보물섬’이라 부른다. 증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검산마을 앞바다에서 14세기 중국 원나라 시대의 도자기 2만여 점과 동전 28t등 모두 2만3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도의 보물은 600년 만에 햇빛을 본 해저유물 뿐만이 아니다. 사옥도의 지신개선착장에서 철부선을 타고 증도 버지..
전북 정읍시 소성면 두암교회 정읍 두암교회 두암교회 윤임례 집사를 비롯해 23명이 순교한 이곳은 일제시대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교인들은 교회에 가기 위해 멀리 걸어 다녀야 했던 두암 마을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김용은 전도사가 윤임례 집사 가정을 중심으로 단촐한 기와집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가 창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해 부흥집회를 가졌는데 평양에서 공산주의를 접했던 임전도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이 날 집회도 비판적인 내용을 말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읍에도 공산군이 들어왔고 두암 마을 주변은 공산군과 반공세력간의 총격전이 수시로 벌어졌다. 두암 마을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군에게는 눈에 가시와..
전남 영암 군서면 구림교회 공산당과 맞서 신앙을 지키다 희생당한 구림교회 순교자들 1922년 구림공립보통학교 교장의 사모였던 김숙자가 김학동, 이신흥 등과 함께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예배 처를 마련하면서 구림교회가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복음의 확산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이 계속 더하여 갔으며 해방과 함께 나라의 재건과 자립을 위해 힘을 키우는 한편 이 지역 9개 교회를 중심으로 사랑의 나눔이 아름답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인한 6.25전쟁의 발발은 평화롭던 영암 땅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영암지역은 월출산의 험준한 산새로 인해 지방 공산당의 은거지와 빨치산의 중요한 활동거점이었다. 유달리 우익성향이 강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컸던 이 지역에 인민군들..
[이탈리아]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Piazelle Michelangelo) 니콜로 다리 건너 아르노강(江) 오른쪽에 있다. 1871년 조성되었으며, 광장 중앙에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다비드》 복제품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피렌체의 전경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아르노강과 그 위를 지나는 유서 깊은 베키오 다리, 붉은 지붕으로 가득한 피렌체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광장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아 그림을 판매하는 화가들이 여럿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 Croce) 유럽 전역에서 성행한 고딕양식도 고유의 오랜 전통과 맑은 풍토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는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극히 적은 예를 제외하면 이 나라 특유의 절충적 작품이 얼마간 있을 뿐이었다. 이 성당도 이러한 과도기의 상황 속에서 생긴 건축의 하나이다. N.피사노의 제자인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를 바탕으로 1294년에 탁발승단의 프란체스코회수도원 성당으로서 착공, 1442년에 완공되었으나 그 동안에 당초의 설계는 계속 변경되었으며, 말기에는 브루넬레스키도 참가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바실리카를 연상케 하는 T자형의 간결한 플랜에, 폭이 넓은 바닥과 상승감(上昇感)이 없는 낮은 천장 등 모든 면에 걸쳐 고딕 양식과 대립되는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물론 열주의 들보 길이와 측..
[이탈리아] 피렌체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 1298년에 착공하여 몇 번에 걸친 개조 공사를 통해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540년에 코시모 공작 1세의 명으로 바사리가 내부를 개조했다. 일찍이 피렌체 공화국(토스카나 공화국)의 청사였던 건물로, 현재도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 오른쪽 입구로 계단을 올라가면 대청으로 들어서게 되며, 대청 양쪽 벽면에는 바사리와 그 일파가 그린 메디치의 전투장면이 있다. 3층에는 기를란다요의 로마 영웅들을 표현한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그밖에도 마키아벨리 초상화, 프란체스코 1세의 방, 지구의 방 등 옛날 피렌체의 부와 힘을 느끼게 하는 유물들이 많다.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마리아델피오레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 아르노강(江)의 북쪽, 피렌체시(市)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지도적 구실을 한 피렌체에 어울리는 대성당의 실현을 대망하던 시의 결의에 따라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로 착공되었다. 공사 도중에 그가 죽자 조토에 이어 A.피사노가 공사를 인계받아, 그 동안 조토가 새로 계획하였던 정면 오른쪽의 대종탑을 거의 완성하였다. 또한 그 뒤를 이어받은 프란체스코탈렌티는 1357년 이래 건물 규모의 확장을 추진하여 1421년경에는 폭 42 m의 삼랑식(三廊式) 회당부(會堂部)와 지름이 이와 맞먹는 광대한 8각 평면의 내진(內陣), 그리고 여기서 세 방향으로 내물린 제실(祭室)을 완성하였다. 한편 시민의 기대를 모았던 대원개(大圓蓋)의 공사는 그것이 광대한 내진 전체를 덮는 구상이었..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Chiesa di Santa Maria Novella ) 1278년 당시의 도미니크파 최대의 성당으로 착공되어, 1300년에서 1350년 사이에 일단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계와 지도는 후라 시스토와 후라 리스트로 두 설교승(說敎僧)이 맡았는데, 이 두 사람은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라 성당의 조영(造營)에도 관계한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전체의 외관은 얼핏 보아 다소 높고 단순한 바실리카풍으로, 내부는 간결한 교차궁륭(交差穹窿)으로 덮여 있는 3랑식(三廊式) 회당부(會堂部)와 직선적으로 정리된횡당(橫堂)과 내진(內陣)으로 되어 있으며, 경쾌한 궁륭과 이를 지탱하는 날씬하고 아름다운 열주(列柱)를 비롯하여 모든 면에 걸쳐 불필요한 장식을 극력 생략함으로써 명쾌하고 정돈된 공간을 만들어내었다. 현재의 서쪽 정면은, 뛰어난 예술가이며 또한 이론가로 알려졌던 ..